마쓰쿠라 가쓰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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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쿠라 가쓰이에는 에도 시대 초기의 다이묘로, 아버지 마쓰쿠라 시게마사와 함께 시마바라성과 성하 마을을 건설하고 가혹한 수탈을 자행했다. 그는 영지를 과대평가하여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고, 기리시탄을 탄압했으며, 1630년 아버지의 사망 후 번주가 되어 더욱 가혹한 통치를 펼쳤다. 1637년 시마바라의 난이 발발했고, 1638년 반란 책임으로 개역되어 참수형에 처해졌다. 그는 다이묘 신분임에도 할복이 허용되지 않고 참수된 유일한 인물로, 막부는 그의 처형을 통해 다른 다이묘들에게 경고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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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쿠라 시게마사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걸쳐 활약한 무장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공을 세워 번주가 되었으나, 과도한 세금 징수와 기독교 탄압으로 백성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시마바라의 난 발발의 원인을 제공했다. - 마쓰쿠라씨 - 시마바라번
시마바라 번은 에도 시대 히젠 국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번으로, 아리마 씨의 지배를 거쳐 마츠쿠라 가문, 고리키 가문, 후코즈 마츠다이라 가문, 토다 가문 등이 번주를 역임했으며, 특히 후코즈 마츠다이라 가문은 학문 장려에 힘썼으나 척박한 토지로 인한 재정난에 시달렸다. - 시마바라번주 - 아리마 하루노부
아리마 하루노부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기리시탄 다이묘로, 히젠 아리마 씨의 당주이자 히노에 번 번주였으며, 가톨릭 개종 후 덴쇼 소년사절단 파견, 임진왜란 참전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나, 이후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 후 처형되었고, 그의 죽음은 에도 막부의 기독교 탄압 강화와 시마바라의 난의 배경이 되었다. - 시마바라번주 - 마쓰쿠라 시게마사
마쓰쿠라 시게마사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걸쳐 활약한 무장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공을 세워 번주가 되었으나, 과도한 세금 징수와 기독교 탄압으로 백성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시마바라의 난 발발의 원인을 제공했다. - 1597년 출생 - 마르틴 오피츠
마르틴 오피츠는 17세기 독일 시인이자 문학 이론가로, 슐레지엔 시인 학파의 수장이었으며 독일어 시의 형식과 언어 규범을 정립하여 "독일 시의 아버지"로 불리고, 그의 저서 《독일 시론》은 독일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희곡 《다프네》는 독일 최초의 오페라로 기록되었다. - 1597년 출생 - 김광찬
김광찬은 김상헌의 양자이자 형조낭청을 지냈으며, 병자호란 때 인조를 호종하고 청나라에 인질로 간 아버지를 따라갔으며, 사후 영의정에 증직된 인물이다.
마쓰쿠라 가쓰이에 | |
---|---|
기본 정보 | |
씨명 | 마쓰쿠라 씨 |
이름 | 마쓰쿠라 가쓰이에 |
이명 | 시게쓰구 |
상세 정보 | |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출생 | 게이초 2년 (1597년) |
사망 | 간에이 15년 7월 19일 (1638년8월 28일) |
관위 | 종5위 하나가토노카미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도쿠가와 이에미쓰 |
번 | 히젠시마바라 번 번주 |
씨족 | 마쓰쿠라 씨 |
아버지 | 마쓰쿠라 시게마사 |
어머니 | 불명 |
형제자매 | 가쓰이에, 시게토시, 산야, 도도 다카요시 정실, 보조 도시아키라 실 |
배우자 | 정실: 가타야마 소테쓰 (요안)의 딸 |
경력 | |
시마바라 번 번주 | 2대 (1630년 ~ 1638년) |
전임 | 마쓰쿠라 시게마사 |
후임 | 고리키 다다후사 |
2. 생애
마쓰쿠라 가쓰이에는 마쓰쿠라 시게마사의 아들로, 1630년 아버지의 사망 후 시마바라번의 번주가 되었다. 가쓰이에는 아버지를 능가하는 가혹한 통치로 백성들을 쥐어짰으며, 이는 결국 시마바라의 난이라는 대규모 농민 봉기로 이어졌다.
2. 1. 가혹한 통치와 시마바라의 난
아버지 마쓰쿠라 시게마사와 함께 시마바라성과 그 성하 마을을 새로 짓고, 참근교대 비용, 계획만으로 좌절된 루손 원정 준비 등 여러 가지 명목을 내세웠다. 또한 독자적으로 검지를 실시하여 실제로는 4만 석 정도의 석고를 10만 석으로 과대하게 추정하여 영민들에게 10만 석에 해당하는 과중한 연공·노역을 부과했다. 더 나아가 호화로운 시마바라성을 개축(성을 전면 흰색으로 도색하는 등)했으며, 영내에 많았던 기리시탄에 대한 탄압도 잔혹하기 그지없었다.[1]간에이 7년(1630년)에 아버지 시게마사가 급사한 후 번주가 된 후에는 아버지를 능가하는 가혹한 수탈을 행하여 영민들을 괴롭혔다. 간에이 11년(1634년)은 악천후와 가뭄으로 흉작이 들었지만, 가쓰이에는 용서 없이 중과세를 징수했다. 쌀이나 농작물의 징수뿐만 아니라, 인두세나 주택세 등 모든 종류의 세금을 신설하여 엄격하게 징수했는데, 이는 많은 기록(『나베시마 가쓰시게 공보』, 네덜란드 상관장니콜라스 퀴케바커의 일기 등)에 남아 있다.[1]
또한, 『구로다 나가오키 일세지기』에 따르면, 간에이 14년(1637년) 10월, 구치노쓰 촌의 촌장 요자에몬의 아내는 임신한 채 인질로 잡혀 차가운 수뢰에 알몸으로 갇혔다. 마을 사람들은 촌장 집에 모여 어떻게든 연공을 납부할 방법을 논의했지만, 더 이상 낼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촌장의 아내는 6일 동안 고통을 겪었고, 물속에서 아이를 낳은 뒤 함께 숨졌다. 참다못한 영민들은 10월 25일 드디어 봉기하여, 대관소를 습격하여 대관을 살해했다. 이것이 시마바라의 난의 시작이다.[1]
2. 2. 개역과 참수
간에이 15년 4월 4일(1638년 5월 17일), 시마바라의 난 진압 후, 마쓰쿠라 가쓰이에는 히젠 가라쓰번주 데라자와 가타타카와 함께 반란을 일으킨 책임이 추궁받았다. 가쓰이에는 개역되어 영지를 몰수당했으며, 4월 12일에는 미마사카 쓰야마번주 모리 나가쓰구에게 맡겨졌다. 『시마바라의 난 마쓰쿠라기』에 따르면, 저택에 있던 통에서 농민으로 보이는 시체가 나와 이것이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고, 5월에 조사를 위해 에도로 호송되어 같은 해 7월 19일에 에도의 모리 가문 하 저택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다이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무사로서의 명예로운 형벌인 할복조차 허용되지 않고, 일개 죄인으로 참수형에 처해진 것은 에도 시대 전체를 통틀어 가쓰이에 단 한 사람뿐이다.막부는 가쓰이에를 참수함으로써 여러 다이묘에게 반면교사로 삼도록 했다.
2. 3. 가쓰이에 처형 이후
간에이 15년 4월 4일(1638년 5월 17일), 마쓰쿠라 가쓰이에는 히젠 가라쓰번주 데라자와 가타타카와 함께 시마바라의 난을 일으킨 책임이 추궁받았다. 가쓰이에는 개역되어 영지를 몰수당했으며, 4월 12일에는 미마사카 쓰야마번주 모리 나가쓰구에게 맡겨졌다. 『시마바라의 난 마쓰쿠라기』에 따르면, 저택에 있던 통에서 농민으로 보이는 시체가 나와 이것이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고, 5월에 조사를 위해 에도로 호송되어 같은 해 7월 19일에 에도의 모리 가문 하 저택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1] 다이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무사로서의 명예로운 형벌인 할복조차 허용되지 않고, 일개 죄인으로 참수형에 처해진 것은 에도 시대 전체를 통틀어 가쓰이에 단 한 사람뿐이다.[1]막부는 이에미쓰의 친정이 시작된 이후, 간에이 12년 (1635년)의 무가 제법도에서의 산킨코타이 규정을 개정하여, 다이묘에게 산킨코타이의 부담을 줄이는 것을 요청했고, 1640년대 전반의 간에이 대기근에 대한 대응을 바탕으로, 여러 다이묘에게 백성의 생활 향상을 중시하는 정책(백성 성립)을 추진해 갔다.[1] 그 관점에서도 막부는 가쓰이에를 참수함으로써 여러 다이묘에게 반면교사로 삼도록 했다.[1]
백성들은 칼 사냥 이후에도 다량의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시마바라·아마쿠사 봉기 이후 백성 봉기를 일으킬 때 무기 사용을 자율적으로 규제하고 막번 체제를 부정하지 않는 것을 주장했다.[1] 그 때문에 백성 봉기에서는 백성은 낫 등의 농기구를 가지고 "백성"임을 자각하면서 백성의 권리와 생활을 보장할 것을 막부와 다이묘에게 청원했다.[1]
가쓰이에에게는 2명의 동생이 있었는데, 장남인 시게토시는 사누키국, 무쓰국아이즈에 맡겨진 후 메이레키 원년 (1655년)에 자살했다.[1] 차남인 미야는 목숨을 건졌지만, 낭인이 되었다.[1] 시게토시의 계통은 300俵의 하타모토로 존속하고 있다.[1]
3. 평가
시마바라의 난 진압 후, 간에이 15년(1638년) 4월 4일 가쓰이에는 히젠국 가라쓰번주 데라자와 가타타카와 함께 반란을 일으킨 책임이 추궁되어 개역되고 영지를 몰수당했다. 4월 12일에는 미마사카국 쓰야마번주 모리 나가쓰구에게 맡겨졌다. 『시마바라의 난 마쓰쿠라기』에 따르면, 저택에 있던 통에서 농민으로 보이는 시체가 나와 이것이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고, 5월에 조사를 위해 에도로 호송되어 같은 해 7월 19일에 에도의 모리 가문 하 저택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다이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무사로서 명예로운 형벌인 할복조차 허용되지 않고 일개 죄인으로 참수형에 처해진 것은 에도 시대 전체를 통틀어 가쓰이에 단 한 사람뿐이다.[1]
막부는 이에미쓰의 친정이 시작된 이후 1635년 무가제법도에서 산킨코타이 규정을 개정하여 다이묘에게 산킨코타이 부담을 줄이는 것을 요청했고, 1640년대 전반 간에이 대기근에 대한 대응을 바탕으로 여러 다이묘에게 백성의 생활 향상을 중시하는 정책(백성 성립)을 추진해 갔다. 그 관점에서도 막부는 가쓰이에를 참수함으로써 여러 다이묘에게 반면교사로 삼도록 했다.[1]
백성들은 칼 사냥 이후에도 다량의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시마바라·아마쿠사 봉기 이후 백성 봉기를 일으킬 때 무기 사용을 자율적으로 규제하고 막번 체제를 부정하지 않는 것을 주장했다. 그 때문에 백성 봉기에서 백성들은 낫 등의 농기구를 가지고 "백성"임을 자각하면서 백성의 권리와 생활 보장을 막부와 다이묘에게 청원했다.[1]
참조
[1]
웹사이트
Walking around the castle
https://shimabarajou[...]
2024-10-16
[2]
서적
A History of Christianity in Japan
F. H. Revell
1909
[3]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https://www.worldcat[...]
Cassell & Co
2000
[4]
웹사이트
Rediscover Our Hometown: "Matsukura Katsuie (1597-1638), the Second Lord of Shimabara Castle"
https://www.city.shi[...]
2021-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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